전통의례 해설

자운서원(紫雲書院)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5. 11:47

자운서원 (紫雲書院)
법원로 자운서원로 204 (법원읍 동문리 산 5-1) 에있는 서원.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肅宗)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율곡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조선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는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에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 《성리설》, 《성학집요》, 《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는데,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등으로 은퇴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 뒤 전란이 종결되자 단양군수,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688년(숙종 14년)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다시 종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조선의 정치가ㆍ유학자.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반남(潘南). 한성(漢城) 출생.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받고는
 과거공부를 포기, 김상헌(金尙憲) 문하에서 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송시열과도 학문 교류를 했다.
28세에 천거로써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1659년 효종이 별세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腹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인(西人)으로 송시열과 함께 이를 기년(朞年:만 1년)으로 정하게 했다.

1674년(숙종 즉위) 남인(南人)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제거됨에 따라 삭관(削官)되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사업(司業)에 기용, 이어 집의(執義)ㆍ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으며 1683년 서인이 노론ㆍ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와 영수가 되었다.
그 후 정권은 또 남인의 손에 들어갔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당쟁에는 가담했으나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 당쟁의 근절에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文集), 논어ㆍ맹자의 찬요(贊要), 시(詩)에 관한 요의(要義), 신라ㆍ고려ㆍ조선에 이르는 유현(儒賢)들의 사우연원(師友淵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 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