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소령원(昭寧園)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4. 11:35

 

소령원(사적 제358호) 소재지: 광탄면 소령원길 41-65 (광탄면 영장리 267)조선 21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묘


 숙빈최씨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이다.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1681년(숙종 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을 때 12세의 나이로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궐생활을 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희빈장씨가 왕비가 되자 모진 구박을 받았다.

 

그녀는 밤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기를 기도하였는데,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1693년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다.
그러나 영수는 2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연잉군(延?君) 이금(李昑:후의 영조)을 낳았다. 그해 숙의(淑儀)가

된 데 이어 1695년에는 귀인(貴人)에 오르고, 1699년 정1품 숙빈(淑嬪)에 봉해졌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에는 더욱 지극히 숙종을 섬겼으나, 숙종이 희빈장씨와 같은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왕실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따르면 영조의 아래로도 왕자가 있었으나 어렸을 때 죽었다고 한다.

1718년(숙종 44)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어머니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1744년(영조 20)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1753년(영조 29)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묘소 또한 1744년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1753년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으며, 후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를 더하였다.

한편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숙빈최씨의 고향은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도 가담하여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 처했으나, 영조가 어머니의 고향이라 하여 관대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숙빈최씨의 이름은 ‘복순’이며 어려서 가족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고아가 되었는데, 나주목사 일행을 만나 목사의 부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씨가

거두었으므로, 훗날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 궁인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