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용주서원(龍洲書院)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6. 11:47

 

용주서원(龍洲書院)
월롱산 기슭에 위치한 용주서원(龍洲書院)은 조선 선조(宣祖)때 유학자이며 청백리에 녹선된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 1497~1579)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건립된 서원이다.
선조 31년(1598) 백인걸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에 지방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유생 정재심(鄭在心)이 사액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유생들이 다시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백인걸 선생 외에 그의 문인이었던 장포 김행(長浦 金行), 옥천 조감(玉川 趙堪), 낙금당 신제현(樂琴堂 愼齊賢), 당산 백유함(堂山 白惟咸)선생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1997년 개축한 5칸 규모의 정륜당과 사우, 내·외삼문, 홍살문 등이 있으며 사우는 홑처마에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7.5m, 측면 5.2m의 6칸 규모이다.
사우건물 좌측 담장 너머에 이곳이 휴암 백인걸선생의 옛 집터임을 알리는 철종 13년(1862)에 화강석으로 세운 『白休庵先生遺墟碑』가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 파주유림에서 제향을 받들고있다.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1497~1579)
본관은 수원(水原), 자 사위(士偉), 호 휴암(休庵), 시호 충숙(忠肅)·개시(改諡)·문경(文敬)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후 돌아와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에 풀려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蓬山)서원,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서원에 배향되었다.

 

옥천 조감(玉川 趙堪 1530~1586)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기(克己), 호는 옥천(玉泉).옥천(玉川).
부친은 목릉전참봉(穆陵殿參奉) 조정견(趙庭堅)이다.
조정견은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어짊을 사모하여 그의 딸을 아들 조감(趙堪)의 아내로 삼고 조감을 백인걸의 집으로 보내 학문을 수학하도록 하였다.
조감이 어렸을 때는 여유있게 생장(生長)하다 하루 아침에 집이 가난해져 죽옥(竹屋) 몇 칸에 풍우(風雨)를 못 가렸으나 조감은 퇴연(頹然)히 그 속에 처하여
편히 여기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학업에 더욱 성취가 있었다.
백인걸을 아버지처럼 여겨 봉양을 바치고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벼슬은 음사(蔭仕)로 장수찰방(長水察訪)에 보직(補職)되었다가, 41세 때 1570년(선조 9)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2위로 합격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가 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가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고, 1585년(선조 18)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이듬 해 1586년 나이 57세에 사망하였다.
조감은 덕성(德性)이 돈후(敦厚)하고 효우(孝友)가 질실(質實)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위중(威重)이 있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기며
친척들을 두루 살펴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그에게 심복(心服)하였다.
파주(坡州) 월롱산(月籠山) 기슭에 있는 용주서원(龍洲書院: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298번지 소재)에 배향(配享)되었다.

 

장포 김행 (長浦 金行 1532∼158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 상(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사희(士熙)이고, 아버지는 국평(國枰)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극효(克孝)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어려서 백인걸(白仁傑)과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인데 그는 성혼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벼슬은 내직으로 전적ㆍ형조좌랑ㆍ호조좌랑ㆍ예조정랑ㆍ한성부서윤ㆍ사성ㆍ사도시정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무장현감ㆍ고양군수ㆍ서천군수ㆍ양주목사

ㆍ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주로 외직에 머물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필법이 호장활동하다는 평을 들었고,
1575년(선조 8)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증도가(證道歌)」를 보완하여 간각(刊刻)했다.
또한, 무예와 지략에도 뛰어나서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그를 천거하여 전라도병마절도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곧 죽었다.
이제신(李濟臣)과 친교가 두터웠다.

낙금당 신제현(樂琴堂 愼齊賢)
자료를 찾을 수 없음.

백유함 (白惟咸 154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중열(仲說). 참교(參校) 사수(思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이고, 아버지는 인걸(仁傑)이다.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년(선조 3)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의 정자(正字)·박사·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에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당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 : 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 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서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된 후,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 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했는데, 이후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복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그런데 정응태는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 후 광해군 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양주로 방환(放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