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파산서원(坡山書院)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5. 11:28

 

파산서원 (坡山書院)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235. 1983년 09월 19일 경기문화재자료 제10호. 조선시대의 서원.
이 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39~1564)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 아우 절효공 성수종(節孝公 成守琮, 1465~1579) 및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선조 원년에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등 파주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효종 원년(1650)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존속되었던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곳이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 것을 그 뒤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1966년 서원 본전인 사당만 복원하였다.
사당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돌리고 정면 중앙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사당은 이별대의 기단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과 원기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前面)칸은 툇칸이고 각 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며 기둥머리는 이익공(二翼工)의 공포형식이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39~1564)
조선 중종, 명종 때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 · 죽우당(竹友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이며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의 아들이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버지이다.
동생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에게서 수학하여 형제가 모두 명망이 높았다.
중종14년(1519)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지만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와 많은 추종 선비들이 처형되고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서실 몇 간을 지어 청송(聽松)이란 편액을 내 걸고는 두문불출하였다.
대학(大學), 논어(論語) 등 경서를 연구하고 태극도(太極圖)를 베껴 우주 조화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지냈다.
1541년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경기도 파주 우계(牛溪)에 있는 처가 근처로 은거하였다.
1552년 이후 내자시주부 예산현감 토산현감 적성현감 사지(司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4년 세상을 떠날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쌀 콩 역부(役夫)를 제공하게 하였으며, 사헌부집의에 추증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추구해 온 도학적 지치주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는 것을 목도하고 평생 산간에 묻혀 은일자로 일관하였으며, 학문탐구와 자기수양 후생교육에 열중하였다.
 이이(李珥)가 행장(行狀)을, 기대승(奇大升)이 묘지명(墓誌銘)을, 이황(李滉)이 묘갈명(墓碣銘)을, 조익(趙翼)이 묘갈음기(墓碣陰記)를 지었는데, 이것은 조선중기 학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1497~1579)
본관은 수원(水原), 자 사위(士偉), 호 휴암(休庵), 시호 충숙(忠肅)·개시(改諡)·문경(文敬)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후 돌아와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에 풀려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蓬山)서원,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서원에 배향되었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파평 우계(牛溪) 옆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우계선생이라 불렀다.
성혼은 명종 6년(1551) 생원·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 9년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 이이 선생과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선조초 때부터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이조참판에 특배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찬에 오르고 선조 27년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관련하여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절효공 성수종(節孝公 成守琮, 1495 ~ 1533)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숙옥(叔玉)이고, 호는 절효(節孝)이다.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며,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김정(金淨)·기준(奇遵) 등 신진사류들이 제거되었다.
그때 그도 조광조의 문인이라 하여 대사간 이빈(李?) 등의 탄핵을 받고 급제가 취소되었다.
사사된 조광조의 장례 때 다른 사람들은 감히 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연경(李延慶)·이충건(李忠楗) 등과 함께 가서 통곡하였다.
이후 과거를 버리고 학문을 연구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그가 기묘사화로 인해 과방(科榜)에서 삭제된 사건은 후에 몇 번의 논란이 있었다.
죽은 뒤인 1553년(명종 8년) 6품 관직을 제수받았고, 1568년(선조 1년) 홍패(紅牌)를 환급받았으며, 1741년(영조 17)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무겁고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과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배향되었다.


파산서원 (坡山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