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방촌 영정각 (厖村影幀閣)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7. 17:09

 

방촌영정각 (厖村影幀閣)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127에 위치하고, 경기도 기념물 29호이다.
조선 초기(朝鮮初期)의 명재상(名宰相)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도 한다.
한국전쟁으로 전부 불탄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영당의 구조는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있으며
측벽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이며, 단청이단아하다.
영당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에 직사각형의 담장이둘러쳐져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영당주위로는 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반구정과 앙지대가 있으며 재실인 경모재와 선생의 고손인 월헌공 황맹헌

선생의 부조묘 등이 있다.

방촌 황희(厖村 黃喜)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선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27세 때 문과에 급제성균관학록이 되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왕이직접 벼슬을 내렸다.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태종대에 국가기반을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황희선생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조선의 최장수 재상으로 고려말부터 조선으로 교체되던 우리역사의 격동기 속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여러 요직을 두루거치며 문물과 제도정비에 노력하여 조선 태종(太宗)대에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세종(世宗)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議政府)의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종2년(1452)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세조 원년(1455)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여정을 모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50여년 전의 일이다.

 

조선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村 黃喜, 1363~1452) 선생의 묘이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역시 규모가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4개의 화창이 투각된 장명등이 있다.
봉분좌측에 묘갈이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있는 원모재 앞 언덕에 신도비가 있는데 연산군 11년(1505)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