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월계단(月桂壇)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8. 12:42

 

충정공 황보 인 (忠定皇甫仁, ?~1453)
본관 영천(永川). 자 사겸(四兼) ·춘경(春卿). 호 지봉(芝峰). 시호 충정(忠定). 
1402년(태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으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세종 때 장령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40년 평안 함길도 체찰사(體察使)가 된 후 10년 동안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월계단 외에 종성의 충렬사(忠烈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공주의 익당서원(익塘書院),

진주의 유동서원(遺東書院), 광주의 오봉서원(五峰書院), 영일의 광남서원(廣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묘는 천현면 동문리에 있다.

 

충익공 김종서(忠翼公 金宗瑞 1383 ~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1433년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묘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충남기념물 제16호. 본관 순천(順天) 자 국경(國卿) 호 절재(節齋) 시호 충익(忠翼)
1383년(고려 우왕 9) 전라남도 순천에서 도총제로 봉직하던 무관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동안 맡았다.
또한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세조)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충장공 정분 [忠莊公 鄭?, ?~1454]
본관 진주(晉州). 자 자외(子畏). 호 애일당(愛日堂). 시호 충장(忠莊).  판중추부사 이오의 아들이다.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421년(세종 3) 이조좌랑을 거쳐 1425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1428년 사인(舍人)으로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 구호에 공을 세웠다.
1430년 집의(執義)로서 성개(成?)의 노비사건을 계문(啓聞)하지 않은 죄로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나와 우승지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했다.
그 후 공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1444년 예조참판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1447년 좌참찬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1449년 이조판서, 이듬해에 우찬성으로 충청 경상도도체찰사가 되어 충주로 향하던 중 계유정난으로 낙안에 안치,관노가 되었다가 사사 되었다.
월계단 외에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 장흥의 충렬사 등에 봉안 되었다.

 

충의공 김문기 [忠毅公 金文起, 1399~1456]
본관 김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초명 효기(孝起). 정호(亭號)는 마암(馬巖) 시호 충의(忠毅). 본관은 금녕(金寧)으로 사직(司直) 관(觀)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백지리 효자동(白池里 孝子洞)이라 불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활달하며 언변에 능하고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 겸비한 천재라 하였다.
1453년(단종 1)년 형조참판, 춘추사 함길도관찰사도절제사 때는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하여 공적이 컸고, 한어(漢語)와 외교에 밝았다. 
문종이 승하할 때 단종을 부탁받고 단종 보호에 힘썼으나 계유정난 때부터 안평대군편이라 내몰렸으나, 당대 인물로서 세조가 여러 차례 포섭하고자 할 때마다 위기를 면하였다.
내외종간인 박팽년과 특히 친밀히 지내 병권을 동원해서라도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동지들과 노력하다가 1456년(세조 2) 6월 2일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단종과 동지들에게 누가 미칠까 오직 홀로 불복하다가 음력 6월6일 아들 현석과 함께 순절하였다.
월계단 외에 옥천에 삼계서원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타버렸고, 의령의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 의성의 덕양서원, 금릉의 섬계서원, 나산사 화림서원, 오강서원, 호계서원, 효암서원, 태충각, 도동서원, 오례사, 익산서원, 금회서원, 왕의영당, 충렬사, 가일사 등에 배향되었다.   

 

충정공 민신 [忠貞公 閔伸, ?~1453]
본관 여흥. 호 둔암(遯菴). 자는 현도(顯道) 시호 충정(忠貞). 시윤(시尹) 불해(不害)의 아들이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 급제하여 청한직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1452년(문종 2) 병조,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김종서(金宗瑞) 등과 어린 단종을 보호하였는데, 그 때문에 수양대군 일파의 적이 되었다.
부사(副使)로서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가게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을 때 현릉(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다, 다섯 아들과 함께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게

참살되었다.
월계단 외에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과 장릉(莊陵)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고, 1822년(순조 22) 네 아들과 함께 5충지려(五忠之閭)의 명정이 해남에

안치 되었다. 

 

충헌공 조극관 [忠獻公 趙克寬, ?~1453]
본관 양주(楊州), 자는 명신(明信), 참찬 계생(啓生)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뒤 사관이 되고, 1418년 정언(正言)으로 서연에 나가 세자 양녕대군(世子:讓寧大君)을 보도(輔導)하던 중
세자의 난행(亂行)을 막지 못해 파직되었다.
그 뒤 재기용 되어 우정언(右正言) ·지평(持平)이 되고 1425년 이조정랑, 1427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7년(세종 19)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거쳐 1441년 공조참의 우승지를 지낸 뒤 평안도관찰사 ·이조참판을 거쳐 144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자 전라도 용안현(龍安縣)에 부처(付處)되었다.
1449년 재차 형조참판에 기용되고 그 해 함길도관찰사에 보직, 야인의 침입을 막아 전공을 세우고, 1451년(문종 1)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함경도

일대의 방수(防戍) 대책을 건의하여 성곽을 보수 신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국방경비에 진력하였다.
1453년(단종 1) 이조판서에 승진했으나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의 일당으로 몰려 궐문에서 격살되었다.
1746(영조 22)에 신원, 1791년 장릉 아래 충신단에 배향 되었다. 월계단 외에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 등에 배향되었다.

월계단(月桂壇)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하며 단종대의 애환이 서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보인 절육신(節六臣) 황보인 김종서, 정분, 김문기, 민신, 조극관, 등

6위를 추모하는 곳이다.
계유정란시 처형되었던 황보인, 김종서 장군 등 6명의 위표가 모셔저있는 제단과 황보인묘, 1920년 6월 3일 파주 유림 이학노, 조병설, 외 25명이 발의하여

1924년 4월 지봉 황보인선생 묘역에 설단(設檀)하고 봉사 해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 십 년간 궐사(闕祀) 하다가 파주애국지사유지정화위원회가 발족된 후 유림들이 단 주위를 정화 하였다.
1986년부터 매년 음력 4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