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례 해설

경현단(景賢壇) 축문과 전경

조진사 2013. 1. 9. 14:18

 

경현단(景賢壇)
경현단은 순조7년(1807년)에 파주 유림이 옥천 조감(玉川 趙堪), 창랑 성문준(滄浪 成文濬),화당 신민일(化堂 申敏一)의 뛰어난 도학과 문예, 거룩한 얼을

기리기 위하여 파산서원 서쪽에 단을 만들어 제향을 받들어왔다.
1808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정초석으로 미루어 1977년 9월 3일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옥천 조감(玉川 趙堪) 1530년(중종 25)∼1586년(선조 19).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기(克己), 호는 옥천(玉泉)?옥천(玉川).
부친은 목릉전참봉(穆陵殿參奉) 조정견(趙庭堅)이다.
조정견은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어짊을 사모하여 그의 딸을 아들 조감(趙堪)의 아내로 삼고 조감을 백인걸의 집으로 보내 학문을

수학하도록 하였다.
조감이 어렸을 때는 여유있게 생장(生長)하다 하루 아침에 집이 가난해져 죽옥(竹屋) 몇 칸에 풍우(風雨)를 못 가렸으나 조감은 퇴연(頹然)히

그 속에 처하여 편히 여기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학업에 더욱 성취가 있었다.
백인걸을 아버지처럼 여겨 봉양을 바치고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벼슬은 음사(蔭仕)로 장수찰방(長水察訪)에 보직(補職)되었다가, 41세 때 1570년(선조 9)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2위로 합격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가 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가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고, 1585년(선조 18)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이듬 해 1586년 나이 57세에 사망하였다.
조감은 덕성(德性)이 돈후(敦厚)하고 효우(孝友)가 질실(質實)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위중(威重)이 있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기며
친척들을 두루 살펴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그에게 심복(心服)하였다.
파주(坡州) 월롱산(月籠山) 기슭에 있는 용주서원(龍洲書院: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298번지 소재)에 배향(配享)되었다.

창낭 성문준(滄浪 成文濬 1559-16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심(仲深), 호는 영동(永同)·창랑(滄浪). 대사헌 세순(世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혼(渾)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지냈다.

아버지가 무욕(誣辱 : 아무 혐의없이 무고로 욕을 당함)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14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를 거쳐, 영동현감(永同縣監)을 역임하였다. 박학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 썼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태극변(太極辨)』· 『홍범의(洪範義)』·『창랑집(滄浪集)』이 있다.

화당 신민일 (化堂 申敏一 1576 선조 9∼1650 효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功甫), 호는 화당(化堂). 원(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미(廷美)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암(?)이며,

어머니는 김지(金?)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학유(學諭)·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감찰,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 등을 지내다가 한때 관직을 사퇴하였다.
1624년(인조 2) 예조정랑으로 선릉(宣陵 :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 단오제 전사관(典祀官)이었는데, 환관 나업(羅業)이 불경스런 행동을 취한 것을

구실로 환관들의 폐를 상소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호종,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그 뒤 장령(掌令)·사간 등을 거쳤으며, 1631년 보덕으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려는 의논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강계로 유배되었다.

1633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화의가 성립된 뒤에는 영남에 내려가 있다가 1640년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650년 대사성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화당집』이 전한다.